트라우마와 같은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특정 한 사건만을 선택해 현재 자신의 복잡한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아주 저렴한 시도라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기초로 던지는 저자의 주장 또한 명확하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다가 만약 미래의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도 던진다. 설사 미래의 꿈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 꿈을 위해 희생한 그 숱한 오늘은 내인생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 ' 이런 물음은 마시멜로 이야기와 상충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 친구는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세. 거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다시 말해 그 친구에게는 바깥에 나갈 수 없다라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내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목적론 이라고 하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생활양식(Life style)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게.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포함하는 말일세.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 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수험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회사원은 직업을 바꾸면 만사가 술술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지. 하지만 막상 바라던 벗이 이루어져도 상황이 뭐 하나 달라지지 않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네.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 거절당했다고,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잊지 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예를 들어 놀거나 취미를 즐기는 시간)을 희생해서까지 변하고 싶지 않다. 즉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거라네. 다소 불만스럽고 부자유스럽지만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한 거지.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자네의 생활양식, 인생을 사는 방식을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자신이라는 사실.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로군요.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어느 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이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어. 상사라는 인간이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데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인정해주기는커녕 얘기조차 들어주지 않네.
하지만 그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 자네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일인가? 회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게 일은 아니지 않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라
자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알고 있나?
기원전 4세기경에 활약한 마케도니아의 국왕이지. 그가 프리지아(Phrygia)로 원정을 나갔을 때 그곳 신전에 기둥에 묶여 있는 전차 한 대가 있었다네. 과거 프리지아의 국왕이었던 고르디우스가 단단히 묶어두라고 명령을 내러서 그렇게 해둔 것이었지. 당시에 "전차를 묶은 매듭을 푼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되리라" 하는 전설이 있었다네. 그런데 어찌나 복잡하고 단단하게 매어 놓았던지. 머리깨나 쓴다 하는 자들이 앞 다투어 도전 했지만 아무도 풀지 못했네. 그런데 알렉산드로 대왕이 어떻게 한 줄 아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보자마다 단검을 꺼내 단칼에 끊어 버렸네.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 "운명이란 전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라고 나는 전설이 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내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겠다. 라는 듯이지. 알려진 대로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중동부터 서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지. 사람들에게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알려진 유명한 일화일세.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매듭, 즉 인간관계의 "실타래"는 더 이상 기존 방법으로는 풀수 없네. 완전히 새로운 수단으로 끊어야 하지.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향해 " 하고 싶은 일을 해"라고 말합니다. 마치 젊은이들 편인 양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그것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요. 하지만 그건 그들이 생판 남이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고요! 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좋은 학교에 가",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라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하는 것은 단순한 개입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책임을 지려는 태도죠. 그 사람의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 하고 싶은 일을 해" 라고 하는 무책임한 말이 나오겠어요! 아마 선생님도 제게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자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라고 말씀하실 테죠. 하지만 저는 그런 무책임한 말, 믿지 않습니다! 그건 어깨에 앉은 벌레를 털어내는 것처럼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이니까요!
요컨대 자네는 어느 정도는 개입이 필요하다. 내 길을 타인이 결정해줬으면 좋겠다. 이 말인가?
타인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내게 어떤 역할을 바라는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인생을 사고 싶은가. 그런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명확한 꿈이나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자네 말대로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사는 것은 어렵지 않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되니까. 가령 부모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린다. 여기에는 다소 불만을 느낄지언정 길을 헤맬 일은 없지. 하지만 내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들면 어떨까? 당연히 이리저리 헤매게 되겠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돼.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중요한 문제이니 함께 생각해보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인생. 다른 사람이 소망을 이룰 수 있게 거들면서 사는 인생. 자네 말대로 이정표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부자유스러운 삶 아닌가? 그러면 왜 그런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하는 것일까? 자네는 자꾸 인정욕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걸세.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세나.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만약 주변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명 전원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지. 그러면 당장은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지는 않을 걸세. 그런데 여기에는 큰 모순이 기다리고 있어.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마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진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네. 물론 그 거짓말은 머지않아 발각될 테고, 그리고 신용을 잃고 인생은 더욱 고달파지겠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전에 말했듯이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그럴 때에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한편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네.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또는 집안일을 하는 것.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야.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일이란 회사에서 일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집안일, 아이 양육,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취미등 모든 것이 일이라네. 회사 업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나를 행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행복해질 용기와 관련된 문제일세.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행복의 정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답을 구하려고 애쓴 건 사실이지만,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바로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