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라면서 한때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난 " 줄로 알았던 적이 있었다. 자라고 보니 사실은 민족중흥보다는 밥벌이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일은 오직 밥벌이와 돈벌이가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책이 답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을 바꿔주지는 못할 것이다. 돈을 주지도 밥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삶에도 리모델링이 있다면 삶 역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위험속에 몸을 던지려는 사람은 없다. 그런 불확실성 속에 뛰어드는 바보 같은 짓을 스스로 할 사람이 누군가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몸을 던진다.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벼랑을 따라 떨어지다가 두터운 구름을 붙잡아 타고 가고 싶은 곳으로 몸을 옮긴다. 누군가는 벼랑 아래로 그대로 추락해 버리기도 한다.
마흔은 변화하기에 좋은 나이다. 욕망과 목마름을 따라 떠나기에 마흔만큼 좋은 나이는 찾기 어렵다.
변화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이 부여잡고 있는 것은 놓치면 당장의 삶이 위협받을 것 같은 "익숙한 것들"이다.
그 "익숙한 것들"을 꼭 잡고 있는 것도, 그 손을 놓아 버리고 벼랑으로 달려가 뛰어내리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설사 뛰어내리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걸. 그리고 언제라도 나의 삶을 꿈꾼다는 걸.
중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시한부 인생이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테리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정말 소중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시한부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하루를 스스로 괴롭히며 살고 싶지 않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이 불치병 진단을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 삶이라는 실체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고, 지금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은 지금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고 슬픈 인종, 남자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어느 시인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하늘을 보고 살기가 두려울 정도로 잘못한 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에게 잘못이 많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한다면 보편적으로 다수의 의견이 맞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크게 잘못을 했다. 그런데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얼 잘못했는지 모른다고 말은 하지만 하지만 그건 사실 거짓말이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할 뿐이다.
간단하다. 가장 큰 잘못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많이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이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돈이 되었다. 남자도 여자도 무조건 돈을 원한다. 그것도 많이 더 많이 원한다. 그런 시대에 돈을 벌지 못했다는 건 큰 죄다. 돌이킬 수 없는 죄다. 그런 상태로 나이까지 먹어서 기회마저 남겨 놓지 않은 지경까지 몰고 갔다는 것은 용서 받기조차 힘들다.
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게 죄였다. 학교를 마치고 나와 취직을 하니 변변치 않은 직장을 잡았다는 게 죄가 된다. 월급을 받으니 월급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죄인처럼 취급한다. 결혼을 하니 이번에는 아내에게 그렇게밖에 못하느냐고 청구가 들어온다. 아이가 생기니 아빠로서 아이에게 무얼해줬느냐고 한다. 아이가 자라니 남들은 다 하는 과외는커녕 학원도 제대로 보내 주지 못한다고 한다.
공부를 못했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잡지 못했지만, 아내에게 잘 해주지 못했지만, 아이 학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나는 잘못한게 없다. 그 안에서, 그 세월 속에서 나는 땀을 흘렸고 눈물도 흘렸고 노력도 했고 밤을 새워 고민도 했다. 그래서 만들어 낸게 오늘의 모습이다. 그 모습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그것은 여태까지의 내 삶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동안 어떤상황에 어떻게 노력했는지,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마만큼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르면서, 단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모욕하지 마라. 그것을 잘못이라 말하지 마라.
그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죽어갈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종. 남자라는 건 정말 이상하고 슬픈 인종이다.
남자의 삶은 항상 부족했다. 여자의 삶이라고 차고 넘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는 특히 부족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그것 하나로 남자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선사시대 이래로 살아온 사람들 중에 누구도 먹고 산다는 것, 먹여 살린다는 것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상 중요한 것을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
미인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삶은 용기 있게 실천하는 자의 것일 게다. 실천하는 자는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꿈만 꾸다 일생이 간다. 실천하는 것은 누구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천하지 못하는 나는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의 누적이 지금의 모습이다. 결국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 힘이되는 건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다시 윤회한다. 예전과 같은 과정을 겪으며 시간이 또 지나간다.
그래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위기는 결국 우둔함과 나태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피터 드러커
매에는 장사가 없다지만 그건 별거 아니다. 정말 장사가 없는 것은 세월 앞에서다.
남들이 말하는 명예는 얻지 못했지만 남을 해하고 살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나쁜 평도 듣지 않았고 손가락질 받는 삶을 만들지도 않았다. 이익을 챙기려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 나름대로 의미 있게 살았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는 삶을 만들어 왔다.
인생의 비극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비극이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러나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은 치욕이다. 나탈리 뒤 투아
첫 번째 꿈은 흘려보냈기에 두 번째 꿈은 더 애틋하다. 세상을 살아보고 나이를 먹고 밥벌이의 피곤함과 삶의 고단함을 겪으며 길어 올린 꿈이기에 더 애정이 간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사람들은 현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는 현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자신의 인생에서는 현자가 된다. 마치 천리안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데, 아쉽게도 그 천리안은 미래를 보는 천리안이 아니라 과거를 보는 천리안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버릴 때 늙는다. 맥아더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100명 중 99명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비판이란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비판은 인간을 방어적 입장에 서게 하고 대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당화되도록 안간힘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생활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사랑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었다. 도전하지 않고, 시도하지 않고 가슴 뛰는 삶을 살 수는 없다. 내 가슴을 뒤흔드는 그 무언가를 저지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 젊은 내가 도전하지 못할 일은 없다. 나는 두 가지를 위해 젊음을 완전연소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떤 일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지조차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 먹고 사는 일에 쫓겨서 심장이 뛰도록 일은 해보았지만 가슴이 뛰는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살아왔다.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인줄 알고 살아왔다.
일에 취해서 술에 취해서 살아가는 남자는 무엇이 하고 싶은 일인지 무엇이 가슴을 뛰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생각해 볼 시간도 생각해 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게 삶의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간다. 그저 돈을 벌고, 그저 술을 마시고, 그저 나이를 먹고, 그저 죽어간다. 일에 빠져서 혹은 술에 취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아야 한다.
배에 남아 있어도 바다에 뛰어들어도 목숨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앤디 모칸은 불꽃이 일렁이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는 확실한 죽음으로부터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을 선택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노동의 종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다.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 그 옛날처럼 평생토록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지 않다. 다른 사람은 그 대상이 되어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이다.
젊은 시절에는 취직 공부를 하느라 청춘을 흘려보내고,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또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싱싱한 젊은 시절에도 제대로 무엇에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나왔다. 뜨거운 연애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죽기 살기로 한 것도 아니고, 지리산을 걸으며 탈진을 해본 것도아니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문제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도 그에 못지않은 삶의 문제다. 마흔은 의문이 시작되는 시기다.
신은 당나귀에게서 18년을 빼앗아 주지만 사람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신은 개와 원숭이에게서 뺏은 나이도 사람에게 준다.
그래서 인간은 첫 30년은 건강하고 행복하다. 18년은 당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며 채찍을 맞는다. 개의 나이를 뺏어 온 그다음의 시간은 따뜻한 불 곁에 앉아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마지막의 시간은 원숭이에게서 받은 시간이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
돈은 달콤하다.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달콤하다. 돈은 자유이고 풍요이고 힘이다. 세상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달콤함, 그 단맛에 빠져 돈을 사모했다. 그러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밥벌이였다. 역시 밥벌이는 위대했다. 삶은 인정사정없이 밥벌이에 끌려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