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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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2025년 이미 읽은 책도 까먹는다 2025. 11. 11. 20:26
동호정대, 정대의 누나정미누나은숙누나진수형 동호의 둘째형동호의 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2인칭으로 너를 묘사하는 것은 내가 몰입이 되지 않고, 무엇가에 끌려가는데 가기 싫어서 발바닥을 바닥에 그리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주저앉았는데, 힘에 의해 질질 끌려가면서도 싫은 느낌이였다. 아직 뜨거운 몽당초를 한 손에 쥔 채 너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시취를 견디며 초의 불꽃을 들여다본다. 냄새를 태워준다는 반투명한 겉불꽃이 어른어른 타오른다. 주황색 속불꽃은 눈을 홀리듯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심을 너는 본다. 2인칭으로 묘사되는 부분에서 나는 이 화자가 누구인지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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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2016.07.06)예전에 읽은 책들/2016년 읽은 책 2025. 8. 4. 07:39
채식주의자 - 남편과 영혜의 시각몽고반점 - 형부의 시각나무불꽃 - 언니의 시각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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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시집)2025년 이미 읽은 책도 까먹는다 2025. 4. 11. 07:55
어느 늦은 저녁 나는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마크 로스코와 나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아직 살아 있다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의 며칠 안팎에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얼마 지나지 않아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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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예전에 읽은 책들/2024년 읽은 책 2024. 12. 3. 07:50
(2024.11.26.) P20 배내옷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무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