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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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시집)2025년 이미 읽은 책도 까먹는다 2025. 4. 11. 07:55
어느 늦은 저녁 나는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마크 로스코와 나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아직 살아 있다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의 며칠 안팎에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얼마 지나지 않아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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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예전에 읽은 책들/2024년 읽은 책 2024. 12. 3. 07:50
(2024.11.26.) P20 배내옷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무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