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을 용기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유치원 교사로서 견실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이 느닷없이 아동 성추행의 가해자로 오해받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자신의 결백을 거듭 주장하며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고, 이에 주인공은 점점 깊은 나락에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을 향한 타인들의 오해와 미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남들은 무심코 던진 돌이지만 그 돌에 맞는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녀사냥의 결과는 무섭다.
P50
겸손의 미덕을 얻기 위해 점점 못난 사람이 되어가는 나. 우리 직장인들이 갖는 자존감의 현주소는 아닐는지?
감정적 상처에 맞서는 10가지 생각법
-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 내가 존재해야 세상도 존재한다.
- 혼자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다.
-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권리는 없다.
- 쓸데없는 비난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 완벽하다고 욕 안 먹는 것이 아니다.
- 소모적인 처세보다 담백한 의사표현이 낫다.
- 어떤 문제도 나 혼자 잘못해서 벌어지지 않는다.
-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에게도 사랑받는다.
- 인생은 나를 사랑해주는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
P59
다양한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내가 주연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린 어릴 때부터 감정을 절제하고 억누르길 원하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나쁜 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억누를 수 있겠나? 감정의 '표현'은 억제하더라도, 내 속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 그 자체는 억누르지 말고 그대로 느껴야 한다. 회사에서 상사의 험담을 들을 때 '아, 내가 지금 화가 나고 있구나' 느껴보고, 떠나온 바닷가 휴가지에서 평온함을 느낄 때 '내가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구나'하고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생각하는 것. 명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하루 일과표를 다시 들여다본다. 나만을 위한 시간은 과연 어디에 있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 성찰이라 해서 굳이 명상을 하라는 건 아니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책을 읽더라도, 심지어 게임을 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재미든 감동이든 편안함이든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나'임을 인지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들. 그런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이삼십 분 줄이더라도, 이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P60
내가 없는 세상은 천국이라도 의미가 없다.
밖으로 뻗어 있는 안테나를 내 속으로 옮겨오는 행위가 필요하다. 동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때론 혼자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혼자 밥먹기를 두려워한다. 고작 '저 사람이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태에서조차 나를 우선순위에 둘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흔하다. 과거에 나를 일순위에 놓고 생각하거나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나를 일순위에 놓고 싶어도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나의 생각과 욕구를 억누르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가 누구이든 나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비난이라는 형태로 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친절히 지적해주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요청하며, 혹시나 풀이 죽어 있거나 기운이 없어 보일 때에는 적절한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만 신뢰하자.
P100
비난은 무작정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무작정 무시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비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비난이 그렇게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끔은 소용없는 충고를 던지는 사람보다는 같이 힘들어하면서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사람이 더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P101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빨리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남들 눈치도 덜 보게 되는 나이와 상황이 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 참자. 다들 꾹꾹 참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쳐 더는 남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직위까지 올라간 것이다'하고 자위하면서 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데 이놈의 직장은 쉽사리 떠날 수가 없다. 나 하나 밥 굶는다 생각하면 또 모르겠지만 나에겐 사랑하는 가족도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 유능하다는 것은 일 잘하고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심리적인 공격을 얼마나 잘 참고 막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도 당연한 덕목이 된 지 오래다.
어떤 사람들은 반복된 비난과 비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편집증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바엔 아예 아무도 밎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다.
자살 비난으로 인해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피해형태다. 죽을 것처럼 힘들 바에야 차라리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건강한 해법이되겠지만, 그런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굴복해 결국 절망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가 바로 자살이다. 어떠한 대책이나 희망도 찾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내가 없어져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121
애당초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온갖 할 수 있는 노력들을 기울이더라도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TV를 봐도 얼굴만 나오면 채널부터 돌리게 되는 연예인이 있듯, 이유가 있든 없든 애초에 나랑은 맞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받아들이고 그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서야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누릴 수 있다.
P124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받아들임, 즉 수용이다.
죽음연구에 관한 저명한 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이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죽음을 대하는 5단계 심리반응'이다.
로스는 중병이나 기타 이유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지는 심리적인 반응을 1부정 2분노 3타협 4우울 5수용의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을 자유
그래 좋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리고 어차피 내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P132
우리가 타인을 상대할 때 상대방의 특성에 맞추어 마치 카멜레온처럼 나의 속성을 변화시켜 가며 관계를 맺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 고유의 색깔을 가지는데 그 색깔들을 상황에 맞게 변경시켜 가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유쾌한 사람은 어딜 가도 그 유쾌함이 도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 그 도도함이 드러낼 수밖에 없다. 유쾌함을 부러워하며, 도도함을 자신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점들이 좋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유쾌함을 진지함의 결여로, 도도함을 건방짐으로 받아들일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멜레온 같은 사람도 '본 모습이 뭔지 모르겠다', '왠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아군이 있고 적국이 있다. 모두가 우리를 좋아할 수는 없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아야만 한다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말고 차라리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욱 챙기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게 낫다.
P151
"네가 틀렸고 난 옳아"라는 말을 하고 싶어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남을 부정하는 방법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일단 스스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올려다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완고함과 고집 때문에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스스로는 이 같은 고립을 인지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관계가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난이라는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사람들이다. 남을 부정해야만 스스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157
감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이모션emotion은 라틴어 'move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움직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emotion에서도 'e'를 빼면 'motion', 즉 움직인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감정은 한곳에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화를 가슴속에 묻어두지 말고 계속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습된 무기력증
절망은 도피를 낳는다. 그나마 화라도 낼 수 있는 때는 주변 환경에 맞부딪힐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경우다. 절망은 이미 그러한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다. 화를 표현하고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기차는 멀리에서 다가와서 내 앞에서 가장 큰소리를 내고 멀어져간다. 비난의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분노도 이와 같다. 사라질 감정임을 생각하고 분노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지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조언과 충고의 형식으로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옳다는 것만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고 저렇게 사는 것이 좋다는 선각자들의 조언도, 무조건적인 인생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맛있는 음식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인생을 사는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사람마다 같을 수 없다. 다수결의 법칙이 의미하는 것도 다수의 의견을 더 인정하다는 것이지 다수가 무조건 옳다는 전제도 아니지 않는가?
나와 너의 옳고 그름은 누구도 자로 잰 듯 판단할 수없다.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그뿐, 그 믿음을 타인에게 강제해서는 안 된다.
황희 정승도 두 명의 하녀 중 누가 더 일리가 있는지 생각은 했을 것이되, 다만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옳다는 사실 판단은 속으로 내리면 그만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덜 피곤해진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 너는 맞다고 생각해라.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옳음은 타인이 아닌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P184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쏟는 시간과 경험은 더욱 소중해진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서 했다는 말이 있다.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오늘날에는 시건방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말 같은데, 실제로는 '우주 가운데 나보다 더 귀중한 존재는 없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말이다.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너도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P222
어떤 경우에는 수많은 지식을 안겨주고 어떤 경우에는 온갖 감정의 선물세트를 안겨주는 행위, 조용하고 고요하면서도 나의 뇌와 마음을 송두리째 요동치게 만드는 행위, 바로 책을 읽는 것이다. 책 읽기는 특별한 공간도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대표적인 자존의 활동이다.
책 읽기에서 자존을 느낄 수 있으려면, 책 읽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할 필요가 있다. 읽는 것 그 자체에서 즐거움과 편안함을 찾으려 해야 한다.
한 권의 책에 가치를 둘 것이 아니라 책 읽는 활동 자체를 하나의 단위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읽는 책이야말로 마음으로의 몰입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P230
타인의 취향에 맞춰 내 모습을 바꾸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비난과 인신공격에 대해서 적절히 맞받아치고,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남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아닐런지?는 표준어가 아니다. 아닐는지가 표준어이다.
그래 완벽하다고 욕 안 먹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고 전지전능한 신도 욕을 먹는다. 안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