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속에 남아 2025. 7. 18. 07:09

어떤 원인,  어떤 명분의 전쟁이든 전쟁의 패자는 늘 민중들이라는 서글픈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약육강식
메이저 영화사 VS 영화노동자

승자독식
거배 배급사 VS 중소배급사

먹이사슬
미국의거대 배급사 VS 한국의 극장주

적자생존
국내 거대 배급사 VS 독립영화

마지막 초상화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경매품목 21번 그림 한 점
8,250만달러에 낙찰

그림 속 주아공은 유럽에서 간질 치료에 널리 쓰이던
디키탈리스란 약초를 들고 있었다.
약초를 잘 다루던 의사 가셰 박사
그를 그린 화가는
그의 환자였다.

1990년
반 고흐가 자살한 지 100년후

의사 가셰의 초상 
초상화를 손에 넣은 갑부는
자신이 죽을 때 그림을 관에 넣어 화장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 후 그 그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권력의 공백상태가 발생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은 12월 12일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날로 거세지는 민주화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에 광주시민들도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부대에 맞서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당시 정부와 언론들은 광주사태, 광주폭등 등으로 표현하며 국가 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으로 발표했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되었다. 1999년 5월 10일 현재,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및 연행 구금자 3642명 등 총 3872명의 인명피해가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987년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려는 이른바 6월 항쟁의 과정에서 1980년 광주의 진실이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3대 국회의 광주청문회를 거치며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신군부의 정권찬탈과정의 전모가 TV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6 공화국 정권은 광주사태를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였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밝히며 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하고, 당시 유죄판결을 받았던 598명의 전과를 말소, 16명에 대한 지명수배를 해제했으며 81명을 특별사면했다.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관계자 사법처리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되기도 했지만, 수감 2년여 만인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인물, 발포명령을 내린 인물, 당시 미국과 미군의 역할과 개입 여부, 정확한 희생자의 규모 등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상은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라쿠카라차
한국에 와서 동요가 된
멕시코 인민들의 피맺힌 역사

보잘것 없지만 끈질긴 노래

라쿠카라차의 뜻은 바퀴벌레

술을 마시되 취하지 말고
사랑을 하되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훔치되 부자들의 것만 건드려라-판초비야

호치민
호아저씨라 불린 진정한 혁명가
식민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핍박받고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주장하는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휴전
우리가 왜 서로 총을 쏴야 한단 말인가?
1914년
기적 같았던 크리스마스 휴전은
단 하루...

이후 4년간
1천만명의 군인이 죽거나 사라졌다.
BC 3,000년 부터 1950년까지 약 1만 4,500건의 전쟁

5,000년 인류 역사 중에서
평화기간은 단 8%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독일군이 프랑스 내륙에서 북해에 이르는 약 800Km의 참호를 파자 연합군 측도 이에 맞서 참호를 팜으로써 기나긴 대치 전선이 형성되었다. 
독일군 진영으로부터 슈틸레나흐트(고요한밤 거룩한 밤) 울려 퍼졌다 상상치도 못한 독일군의 캐롤 소리를 듣게 된 영국병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이에 용기를 얻은 독일병사들은 참호 주변에 촛불을 꽂기 시작했다. 슈틸레나흐트가 끝나자 한 독일군 장교가 스코틀랜드 민요인 애니 로리를 완벽한 영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 영국군의 환호 속에 노래를 마친 독일군 장교는 참호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교다 쏘지 마라. 이제 참호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 영국군 여러분 중에서도 장교가 한 사람 나와달라. 곧 영국군 측에서도 하사 한 명이 걸어 나가 독일군 장교와 대화를 시작했고, 양측은 전사자들을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크리스마스 휴전에 합의했다. 처음에는 양측 약 1000명의 병사들이 크리스마스 휴전에 동참했는데, 이어 야전전화를 통해 이 소식이 인근 전선으로 퍼져나가면서 벨기에 북부 뉴포오트 항구 부근에서 이프레 마을까지 약 40Km에 달하는 전선에 배치된 양측 군사들이 차례로 크리스마스 휴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전선에서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축구경기를 벌이기도 했는데, 당시 축구 경기에 참가했던 한 영국군 병사는 독일군이 3:2로 이겼으나 독일군의 마지막 골은 오프사이드였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휴전 소식을 접한 양측 사령관들은 병사들에게 당장 참호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며 크리스마스 휴전에 동참하는 병사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각각의 본국에서도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곧 크리스마스 휴전은 끝나고 전투는 재개되었다. 이후 44개월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9백만명 이상이 죽었고 2천만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터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1914년을 끝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 도 재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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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지킬려면 TV를 꺼라 고재학 저, 예담